회원가입시 광고가 제거 됩니다
title icon
한국사 수행평가 도와주세요 외워서 쓰는 수행이라 정리 좀 해주세요 ㅜㅜ두번째가 수행평가지인데요 저기 보기에
한국사 수행평가 도와주세요 외워서 쓰는 수행이라 정리 좀 해주세요 ㅜㅜ두번째가 수행평가지인데요 저기 보기에
외워서 쓰는 수행이라 정리 좀 해주세요 ㅜㅜ두번째가 수행평가지인데요 저기 보기에 맞쳐서 글 작성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ㅠ
i
아래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님이 직접 확인해 보시고 참조만 하시길 바랍니다.
===
〔답변〕 신라가 애초부터 삼국 통일의 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후대인의 손길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신라의 금석문에, 신라는 자신을 당의 번(藩), 번국(藩國), 제후(諸侯), 諸侯之外守者(제후지외수자)라 자처... 신라 하대에 만들어진 승려들의 비문들에서는 有唐新羅國(유당신라국), 大唐新羅國(대당신라국) 이라 하여, 신라는 스스로를 당나라의 속국이라고 인식하였다. '삼국 통일' 이후 이전의 형식적, 실리적 사대가 이념적, 실질적 사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
《참고문헌》
당 태종 황제께서 김춘추에게 정2품의 관작을 내리시니 그 영예는 ... 만큼 높은 것이라... 김춘추가 진덕왕 2년 당태종 황제께 당나라의 관복을 하사받고 돌아와 신라의 의관제를 당나라식으로 고쳐서 이듬해부터 신라의 왕과 관원들이 모두 당나라의 관복을 입고 당태종 황제의 신하가 되었다... 당나라의 고종 황제께서도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김춘추로 신라왕을 삼노라 하였다. 당나라의 황제께서는 김춘추가 멀리 푸른 바다를 건너와 궁굴에 조회하여 열심히 조공을 바치는 것을 가상히 여겼다.
<신라 비문 김인문비 해석문 참조>
김춘추가 당태종을 보자,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가 거의 멸망하여 위급함을 알리고 많은 예물을 바쳐 당나라의 구원병을 요청하며 아들 법민(문무왕)과 인문 등을 당나라에 인질로 두고 신라의 의복과 관을 버리고 당의 의복과 관복을 입고 신라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썼다(신라는 당나라의 지방 정부가 되었다). 김춘추는 조선을 업신 여기고 모욕하는 글을 그대로 가져다가 신라에 유포 시켜서 사대주의 의 병균을 퍼뜨렸다.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 참조>
생존을 위한 신라의 對唐(대당) 저자세 밀약 <삼국통일의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 월간중앙 참조>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뜻도 능력도 없었다.
<한국사는 없다, 저자: 이희근, 사람과 사람, 2001년 08월 30일 참조>
삼국통일은 허구이다.
<한국사 새로보기, 저자: 신복룡, 풀빛, 2001년>
​ 통일신라시대가 아니라 남북국시대다.
<이이화의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 저자: 이이화, 푸른역사, 2000년 06월 30일>
'당나라가 고구려를 차지했다'고 기록한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왕명을 받아 최치원이 글을 썼다... 국립경주박물관...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글'...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라고 적었다... 조금 더 읽어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고구려의 잔당이 태백산 아래 모여서 발해를 건국했다.'... 삼한통일은 깨진 것이다. 마한이 결국 발해가 됐으니... 최치원은...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에서... '... 당나라가 고구려를 차지했다'고 기록... 삼국 통일이 아니라, 삼한 통일조차 못한 것... 이 글은 왕명을 받아 작성... 왕의 '최종 결재'도 받았을 것... 신라의... 왕실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했음'... 당 황제가 조치한 것에 감사하며 효공왕이 올린글'... 에서도 '예전의 고구려가 지금은 발해가 됐다'고 기록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는가... 신라인은 삼국 통일에 부정적 인식... 사학계 '신라 띄우기' 역사 왜곡 불러 - 한겨레21 참조>
당나라는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으로,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摠管)으로 임명하여 신라를 공격케 하였다...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는 4만 명으로 알려졌으며 672년 8월 신라군이 석문(石門)에서 당나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신라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신라군의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과 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과 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과 양신(良臣) 등이 사망했다... 석문전투 이후 9월에 신라는 당나라에 사죄문과 금, 은, 구리, 바늘, 우황, 포목 등 막대한 진공품을 바쳤다. 이 해 신라는 곡식이 귀하고 기근이 들었다.
<석문전투(石門戰鬪)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문무왕이 큰 조정(당나라 조정)에 죄를 짓게 되었으므로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신(臣) 아무개(문무왕)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아뢰나이다. 전일(前日)에 신의 위급한 처지가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았을 때 멀리서 황제 폐하의 구원을 입어 도멸(짐승처럼 찢어 죽임을 당하여 도살되어 멸망하는 것)을 면하게 되었사옵나이다. 몸과 뼈가 부수어 바스러진다 하여도 크나큰 은혜를 갚기에 부족하고 머리가 부수어져 재와 먼지가 되어도 어찌 황제 폐하의 자애로운 은덕을 갚을 수 있겠나이까. 그러나 깊은 원수인 백제는 신의 변방을 침범하여 핍박하고, 하늘의 군대를 이끌어 신을 멸하여 치욕을 갚으려 하므로 신은 파멸의 지경에 이르러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짓게 되었나이다. 신이 미처 사정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죽음을 받는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려워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잠시라도 신령스런 귀를 기울여주시어 근본되는 이유를 밝게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신은 전대(김춘추) 이래로 조공을 끊이지 않다가 근래에 백제 때문에 거듭 조공을 빠뜨려서 드디어 성스러운 큰 조정(당나라 조정)에서 말이 나게 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토벌하게 하셨나니 죽어도 받아야 할 형벌이 남음이 있어, 남산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며 포야(褒斜: 중국 종남산의 골짜기)의 숲도 신을 벌할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종묘와 사직을 헐어 연못을 만들고 신의 몸을 찢어 죽이더라도 황제 폐하께서 이 사정에 귀를 기울여 판단해주신다면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육시하다(戮屍--: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에 다시 목을 베는 형벌을 가하다.)}을 받겠나이다. 신의 관과 상여가 곁에 있고 머리를 진흙땅에 대고 죄를 빌다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로 조정(당나라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형벌을 엎드려 청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아서 얼굴의 광채를 온 세상 구석까지 비추시고 덕은 천지와 합치해 동식물이 다 그 은덕으로 살아가며 살리시기를 좋아하시는 덕은 멀리 벌레에까지 미치고 죽이기 싫어하시는 어짐은 새와 물고기에까지 흐르나니 만일 석방의 용서를 내리시어 허리와 머리를 보전할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비록 죽는다 해도 산 것과 다름이 없겠나이다. 바라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히 마음 속의 품은 바를 아뢰오니, 칼에 엎드려 죽을 생각을 누를 길이 없사옵니다. 삼가 원천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죄를 빌고 칙지를 엎드려 들으려 하나이다. 아무개(문무왕)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리고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합니다. 이와 동시에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 20푼, 금 1백 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하였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王獲罪大朝上表乞罪曰臣某死罪謹言昔臣危急事若倒懸遠蒙拯救得免屠滅粉身?骨未足上報鴻思碎首灰塵何能仰酬慈造然深讐百濟隔近臣蕃告引天兵滅臣雪恥臣懼破滅自欲求存枉被凶逆之名遂入難赦之罪臣恐事意未申先從刑戮生爲逆命之臣死爲背恩之鬼謹錄事狀冒死奏聞伏願少垂神聽炤審元由臣前代已來朝貢不絶近爲百濟再虧職貢遂使聖朝出言命將討臣之罪死有餘刑南山之竹不足書臣之罪褒斜之林不足作臣之械?池宗社屠裂臣身事聽勅裁甘心受戮臣?擧在側泥首未乾泣血待朝伏請刑命伏惟皇帝陛下明同日月容光?蒙曲炤德合乾坤動植咸被亭毒好生之德遠被昆蟲惡殺之仁爰流翔泳?降服捨之宥賜全腰領之恩雖死之年猶生之日非所希冀敢陳所懷不勝伏劒之志謹遣原川等拜表謝罪伏聽勅旨某頓首頓首死罪死罪兼進貢銀三萬三千五百分銅三萬三千分針四百枚牛黃百二十分金百二十分四十升布六匹三十升布六十匹是歲?貴人飢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왕이 당나라에 용서를 구하다 (672년 09월(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사람들이 굶주리다 (672년 (음))>
672년 이근행은 20만 명이 아닌, 자신의 말갈족 병사 3만 명을 지휘해 한반도에 왔다. 신라군이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을 패주시킨 게 아니라, 토번과 전쟁을 위해 이근행 부대가 철수했다. 675년 당나라의 신라 원정군 대부분이 철수한 상태에서 매소성 전투는 벌어졌다.
<한나절에 읽는 발해의 역사, (공)저: 이윤섭, 이선영 참조>
​기벌포 전투의 내용도 양측 주력군의 회전이 아니라...신라 측 주장인 시득의 관등이 8등인 사찬이기 때문에 신라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음...또 첫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뒤 크고 작은 전투가 22회나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력 부대 사이의 전투라고 보기 어려운 전황...기벌포 전투가...나당전쟁을 마무리 짓는...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2) - 매경프리미엄 참조>
사찬 시득이 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워 이기다(676년 11월(음)) 그런데 '구당서 권제83'과 '신당서 권제111'의 열전 설인귀 전에는 사뭇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설인귀가 674~676년에 중국 남부의 상주(象州)에 유배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인귀는 670년 8월 토번(吐蕃)과의 대비천 전투에서 패배 후 제명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조>
신문왕대(681~692)에 신라는 한강 이북 지역을 거의 방치... 735년(성덕왕 34)에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 헌덕왕(809~825)에 이르러서야 대동강 남쪽 연안을 신라의 영토로 확정...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은 대동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영토에서 제외... 신라가 애초부터 삼국 통일의 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후대인의 손길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신라의 금석문에, 신라는 자신을 당의 번(藩), 번국(藩國), 제후(諸侯), 諸侯之外守者(제후지외수자)라 자처... 신라 하대에 만들어진 승려들의 비문들에서는 有唐新羅國(유당신라국), 大唐新羅國(대당신라국) 이라 하여, 신라는 스스로를 당나라의 속국이라고 인식하였다. '삼국 통일' 이후 이전의 형식적, 실리적 사대가 이념적, 실질적 사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신라는 계속해서 골품제를 유지함으로써 삼국민의 융합에 제약을 가했다... 김부식도, 고러시대와 조선시대 왕조에서도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하야시 다이스케는 저서 '조선사'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로 규정... 그 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신라의 반도 통일'로 정의... 일본 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배제... 만주를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만주지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옛 고구려 땅은 더 이상 조선의 역사가 아니라는 논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분명한 우리의 역사이므로... '통일 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논문]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재검토 참조>
당나라 현종은 볼모로 장안에 와있던 김사란을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도록 하였다. 신라에서는 발해를 치는 대신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보장한다는 당나라 현종의 밀약을 믿고 김윤중과 김윤문 등 4명의 장군들에게 발해의 남쪽 경계를 치도록 했으나 군사의 절반이 사망하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신라가 참전한 대가로 735년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받았다.
<장문휴의 등주원정 - 문화콘텐츠닷컴 참조>
당나라의 현종은 김사란을 귀국시켜 군사를 일으켜 말갈(말갈은 발해를 가리킨다.) 남쪽 변방을 치게 하였다. 때마침 눈이 많이 내려 한 길(丈) 남짓 쌓여 산길이 막히고 군사의 절반이 사망하여 아무런 공도 없이 돌아왔다. 三十二年(733) 秋七月 唐 玄宗 金思蘭歸國發兵擊靺鞨南鄙㑹大雪丈餘山路阻隘士卒死者過半無功而還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8(第八) 성덕왕(聖德王) 당나라 현종이 발해 공격을 요청하다>
고대 신라에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신분을 나누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근친상간... 카자흐스탄에 살던 스키타이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크 수이예크(... 흰 뼈 제도)라는 신분제도를 만들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 천마를 그린 나무는 자작나무 껍질이다 - 전자신문 참조>
신라의 골품제도를 살펴보면 근친상간과 같은 난잡한 성횅위가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왕족으로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있다. 이러한 골품제도 때문에 신라에서는 왕이 되고 그 자손이 궁궐에 남기 위해서는, 오직 직계 혈통의 왕족끼리 결혼해 성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근친상간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 최고의 色女... - 월간조선 참조>
<[다시 쓰는 고대사] 성골 남자 씨 마른 신라, 선덕 내세워 왕통 신성함 지켜 - 중앙일보>
신라인들은 피정복민을 무섭게 차별화, 도태시키는 정책을 율령으로 만들어 펼첬다.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은 기본적으로 하층 신분으로 편제
<... 신라, 피정복민 통합정책 대신 극심한 차별 - 중앙선데이 참조>
진골이 많아지자 권력쟁탈전이 치열해져서 김춘추의 후손 낭혜 등 진골귀족을 6두품으로 강등하였다. 권력쟁탈전에서 패한 자들은 지방으로 밀려나 신분이 강등되었다.
<진골(眞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신라여, 여왕이여 제발 망해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싶다. 귀족들이 끝없는 탐욕에 눈이 멀어 노비를 3,000명이나 거느린 귀족이 출현한 반면에 남의 집 노비가 되고 심지어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농민도 생겼다. 소수의 사람이 수많은 노비를 부리게 되자, 세금을 바치는 농민의 수는 더욱 줄었다. 수입이 줄어든 정부는 남은 땅과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세금을 매겼다. 이중 삼중으로 수탈을 당하던 농민들은 산으로 숨었으며, 공공연히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고 봉기해 신라 왕조를 위협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895년 세워진 해인사의 묘길상탑에서 '나라 안에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으며, 굶어 죽은 시체와 전쟁으로 죽은 해골이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다.'라는 최치원의 글이 새겨진 벽돌 판이 나왔다. 경주 거리에는 나무 망국 찰니나제라는 글귀가 뿌려졌다. 사람들은 신라여, 여왕이여, 제발 망하기를하고 빌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참조>
===
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님이 직접 확인해 보시고 참조만 하시길 바랍니다.